부활은 생명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부활의 아침을 생각하면 10년 전 아프칸 사건으로 떠난 배형규 목사가 기억납니다. 그 아들을 보내고 슬퍼하셨던 부모님과 가족들, 그를 지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떠나 보낸 모든 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으로 신자의 삶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예수부활로 무너졌음을 확인했을 때, 하늘로부터 영원한 위로가 내려왔습니다.

또 부활의 아침에는 오래 전 슬픔으로 가족을 보낸 성도가 생각납니다. 예쁘게 키우던 아이를 보내고, 부부가 실의에 빠졌을 때, 그 부부의 부모님이 믿음으로 곁을 지켰고 그들의 아픔은 시간의 다리를 건너 믿음의 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자녀를 가슴에 묻고 평생을 걸어가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닌 역사 속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이 아픔을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모든 이들이 부활을 약속으로 받고 생명을 누립니다. 그래서 아픔은 영원 안에서 만날 이를 약속 위에 서서 바라는 그리움이 됩니다. 19년 전, 제가 세 살 박이 아이를 가슴에 묻은 부부에게 써 주었던 글을 여기 나눕니다.

“하늘이 풀어져 울고/ 슬픔은 대지를 적셨다/ 죽음의 등뒤에서/ 슬픔은 가슴들의 둑을 무너뜨리며 홍수로 범람했다// 아이는 부모의 가슴에 묻혔고/ 부모는 하나님의 약속에 가슴을 묻었다//작은 상자 하나 만큼도 채우지 못한/ OO이의 짧은 생애/ 전광(電光)의 찰나를 찍던 이 어린 사진사는/ 추억 앨범의 사진이 되어/ 영원 속으로 사라져갔다// 성도의 위대함은 약속의 비밀 때문이다/ 꽃처럼 시들었어도/ 말씀 안에 살아있는 아이// 우리의 어린 감람나무- 그 어여쁜 이는/그의 정겹던 노래를 타고/ 하나님의 생명 강가에 영원한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었다// 우리들의 아들 OO이는/ 시절마다 노래할 것이다// 사람은 풀처럼 시들지만 믿음은 죽지 않아요/ 저는 믿음 안에 살아있어요/ 믿음 안에서 부끄럽지 않은 생애를 살아주세요// 하나님나라가 없다면 이별은 또 얼마나 허무하랴// 무너진 저 가슴들의 둑 위에 서서/생명의 시냇가를 바라본다/ 희망의 새가 생명을 노래하고 날아간/ 그리움의 땅/ 우리들의/감람나무가 심기운 부활의 대지// 그 나라의 숨소리가 들린다/ 거룩한 그리움이여 가교(架橋)가 되어라/ 우리들의 아들이 있고/ 우리들을 가족으로 맞이할/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깨어나기까지/ 우리 잠들기 전에/ 이 땅을 그리움의 옷으로 다 입히기까지”

(“네가 있는 그리움의 나라” 전문)

오늘 기쁨으로 사는 건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의 은혜입니다. 오늘 어제를 털어내고 웃을 수 있는 건 편안한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평안한 임재의 은총입니다. 기쁨은 고난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臨在)에서 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 생명을 향한 그리움으로 봄을 맞이 하세요. ]

2018년 3월 30일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과 함께 있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