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데리고 살기 어려운 사람과 살기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일상은 2년동안 코로나19로 마치 겨울 북풍에 얼어서 녹을 줄 모르는 강물처럼 꽁꽁 얼어붙은 것 같은데, 하늘은 푸르고 높기만 합니다. 명절도 그 하늘 아래서 하릴없이 지났습니다. 가족의 이름으로 정겨운 기쁨을 나눌 일도, 사연 많은 슬픔을 나눌 일도 있었을 겁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례해서 가끔 관계의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 가족도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살기 참 어려운 게 가족이라 여기고 이불처럼 마음 한 켠에 개켜 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장 데리고 살기 어려운 사람은 다름 아닌 ‘나’입니다. 내가 불편하니 다 불편합니다. 마음이 여기까지 이르면 한 숨이 나옵니다. 참 괴롭습니다. 나는 나를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할까요?

신자도 이렇게 세상 사람과 똑같이 고민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다릅니다. 신자는 자기 직관으로, 자기 판단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헤아려 순종하며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근거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지금 복상하는 출애굽기에 보면, 그 백성은 노예였습니다. 노예였다가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받은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의 깊이가 그 신자된 인생의 깊이를 결정 합니다.

출애굽기를 복상하면서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광야를 지나는 백성들의 허물을 지적하는 직관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출애굽의 시대로 돌아가 그 백성들의 곤고했던 광야를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실수와 허물은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광야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 같은 삶에서 먼저 기억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누구신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을 노예에서 이끌어내신 분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삶을 확장할 수 없는, ‘원형적으로 축소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 받고도 노예시절을 추억하며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편안히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고기 요리와 빵이 잔뜩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들이 우리 이스라엘 온 무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와서 굶겨 죽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출16:3)”

노예가 광야에서 자기 경험과 직관으로 유추할 수 있는 최선은 죽음입니다. 노예의 상상력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출애굽(Exodus) 했습니다. 출애굽(Exodus)은 ex(밖으로)-hodos(길)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건, 이전에 다니던 노예의 길에서 튕겨져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길은 새로운 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은 새로운 안내를 받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담긴 말씀입니다. 명절이 지나고 생각합니다. 가족관계도 새로운 길을 걷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따라 걷고, 걸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데리고 살기 어려운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약속 앞으로 인도하세요. 모든 더샘물 가족들이 노예의 가을이 아닌 구원된 신자의 가을로 물들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2021년 9월 26일
여러분과 함께 Fall Prayer 9을 시작하며,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