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은유를 이해하는 능력에 있다고. 시편 104편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인 하늘, 모든 피조물이 깃든 땅의 세계를 보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만물이 다 일정한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늘 그렇듯 일상적이고 평범합니다. 그런 일상은 얼마나 따분하고 지겨울까요? 의미 없는 반복이라는 폭력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다들 이구동성으로 비슷한 말을 읊조리며 삽니다. 은퇴하면 쉬면서 여행을 하며 살아가겠다, 귀농을 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겠다, 세계일주를 하겠다, 하고 싶은 것 하며 맘껏 살고 싶다고 합니다. 이 안타까운 고백 속에는 오늘의 일상이 의미 없는 반복의 폭력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낙담이 담겼습니다. 사실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녀가 자라고, 관계들이 깊어집니다. 일상의 반복에 담긴 깊은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까요? 104편의 시인이 우리를 그 의미 있는 일상으로 안내합니다. 1절은 말합니다.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십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언어가 동영상처럼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심과 눈부시게 빛나는 권위와 위엄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정물화처럼 한 곳에 붙박이로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을 다니시며 활동하십니다. 빛은 주님의 옷입니다(2). 아침에 햇살이 비췰 때, 우리는 빛나는 옷을 입으신 하나님을 그 햇살 속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새벽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우리 사이를 옷자락을 끌며 다니십니다. 우리를 섬세하게 돌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창문을 통해, 차창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흩어질 때,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가슴으로 한가득 들어오십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주님의 승용차입니다(3). 그렇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구름이 떠가는 곳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을 날개 삼아 다니신다면,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힐 때, 우리는 모든 곳에 주님이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놀라운 상상력입니다.
이번 주에는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 보았나요?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지만, 우리는 땅을 보기도 바쁜 나날들을 보냅니다. 시인의 상상력을 빌리면 좋겠습니다. 중력의 무게로 몸이 아래로 가라앉을 때면, 땅을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거기 모든 들짐승과 새들 그리고 사람이 깃들게 하셨습니다. 시인의 눈을 빌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공급으로 사는 들짐승과 들나귀와 그 나무에 깃드는 새들 그리고 모두 만족하도록 주신 열매와 푸성귀와 먹거리들 그리고 풍성한 포도주와 기름. 놀라운 질서입니다. 심지어 젊은 사자도 먹이를 위해 기도한다(울부짖다)고 합니다. 사자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21). 젊은 사자도 기도하여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먹이를 원하면, 가진 힘으로 얼마든지 먹이를 탐할 능력을 받은 사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 시선이 믿음입니다. 젊은 사자도 기도응답으로 삽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여기에 머물자 내 영혼이 절로 주님을 찬송합니다. 젊은 사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그 번쩍이는 권위와 눈부신 옷자락을 끌고 우리 사이를 다니소서. 젊은 사자의 기도를 주소서. 그 믿음을 주소서.
2020년 2월 2일
젊은 사자의 기도를 함께 배우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