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네가 울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고/아니라고 하면 왜 거짓말같지//울지마/네가 울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뭐라도 힘이 될 수 있게 말해주고 싶은데/모두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한다고 해도/그건 말 뿐이지 그렇지 않니/그래도 울지마” [가수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울지마’의 가사 전문(全文)]

위로. 이번 주 내내 제 마음을 지배한 단어입니다. 가족을 이별한 슬픈 어깨 위에 무슨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늘 가족을 잃는 슬픔을 대하는 일은 난감합니다. 우리 모두가 가진 숙명이기에 더 무겁습니다. 떠나가는 이와 이별한 이의 존엄, 만남의 축복만큼 값지게 치러야 할 이별의 과정, 죽음이라는 숙명을 가져온 아담과 하와의 선택, 그 숙명을 짊어진 우리의 죽음과의 사투, 우리의 운명을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래도 잠시 이별하는 아픔, 그 아픔을 영원히 지워버린 부활의 약속…우리 인생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다 문득, 2007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던 그 때, 무작정 한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에 주님은 강력한 내적조명으로 마음을 밝혀 주셨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장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위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야 얻게 됩니다. 이사야는 위로의 내용을 2절에서 세 가지로 전하면서 외치게 합니다.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 죄의 형벌도 다 받았다, 지은 죄에 대하여 갑절의 벌을 받았다!” 그리고 외치는 한 소리를 듣습니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 주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 한 소리가 ‘너는 외치라’고 또 명령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사40:6-8).”

바벨론 포로로 수 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던져진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의 위로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문화와 바벨론의 풍요에 이미 물들어버린 세대, 믿음의 언어를 잃어버린 세대가 어떻게 바벨론 포로를 끝낼 수 있나요? 바벨론의 풍요가 시들어버릴 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포로의 자리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벨론 귀족이나, 노예나 모두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는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곳은 의미상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유일한 길은 바벨론을 떠나는 진정한 출애굽(Exodus)을 이루는 일입니다. 둔세적으로 살라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세상 한복판에 살되, 정신과 문화적으로 바벨론과 다른 길을 걷는 삶이 신자의 삶입니다. 출애굽(Exodus)은 ‘ex(밖으로)+hodos(길)’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은 가던 길, 익숙했던 바벨론의 길(hodos)에서 빠져나왔다(ex)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에 위로할 힘을 가진 이는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식지 않는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나오는 위로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는 하나님의 체온이 담깁니다. 약속과 순종 안에. 그래서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울지마”

 

2020년 1월 12일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사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