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읽는 것을 잃어버린 시대를 삽니다. 책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 얘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읽으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표정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는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면 그의 눈빛을 ‘읽고’, 그의 인생을 ‘읽으려’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기 어려운 난독보다, 인생을 읽지 못하는 난독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사회적 난독을 정보화시대 이후의 피해라고 합니다. 개인 컴퓨터(PC)의 등장과 인터넷, SNS,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개인이 처리할 정보가 많아져서 사람도 정보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7년 전쯤, 섬기던 학교에서 ‘기독교 영성 및 예술교육’을 1년동안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유럽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프로젝트 수업의 일부로 여름에 삼 주의 시간동안 계획된 여행이었습니다. 바티칸공국, 이탈리아의 포로로마노 유적이 있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비엔나 그리고 독일의 뮌헨과 독일의 지붕이라는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해발 2964m의 츄크슈피체(Zugspitze)까지 돌아보는 여정이었습니다. 봄 여름학기에 성경 배경사와 유럽역사 그리고 미술과 음악사와 작품에 대해 배우고, 가을 겨울학기에는 보고서를 쓰는 프로젝트 수업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미술관이었습니다. 바티칸, 피렌체의 우피치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마침 있었던 비엔날레와 비엔나의 여러 고전과 현대미술관까지 많은 작품을 선생님이 해설해주고 아이들은 감상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은 잠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는 작품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바로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누적된 수많은 사람, 역사,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짧게 정보로 처리해서 카메라 메모리에 가두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세상을 대면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작품을 읽으라고, 작품이 말을 거는 소리를 듣고 읽으라고. 쉽지는 않았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을 정보로 처리하면, 사람됨의 이야기가 다 사라집니다. 마주하는 가족은 압니다. 사랑하는 이를 단지 정보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읽으려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입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런 우리를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 고통을 읽으셨고, 우리 고통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를 읽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읽으신 예수를 읽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해석된 우리 인생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인생 읽기, 읽는 것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성탄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높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 (눅2:14)

 

2019년 12월15일

대강절(待降節) 셋째 주일을 함께 맞이하며,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