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온통 울부짖음 일 때가 있습니다. 내 가슴에 담긴 말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너지고 쏟아져 나오는 날이 있는 법입니다. 인생에 좋은 날이 있는 것은 좋지 않은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은 날들의 기원을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끊어졌던 날에서 찾지 않더라도 그 나날들은 하나님과 끊겨진 우리로 울게 합니다.

후기 조선시대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만수절 (칠순잔치)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연암이 요동 벌판을 본 소감을 남겼습니다. 사십 대 중반이 된 박지원이 1200리 아득한 요동 벌판 앞에 서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답니다. “참 좋은 울음터구나, 크게 한 번 울 만하다.” 요동을 울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호곡장(號哭場)’이라 불렀답니다. 요동이 시원하게 울만한 곳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편88편의 시인은 울부짖음과 죽음의 문턱에 이른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에게 울기 좋은 곳-호곡장(號哭場)이 필요합니다. 기대어 울기 좋은 곳, 크게 울어 자신의 마음과 태어나지도 못한 채, 눈물로 녹아 흐르는 말들을 담아내는 곳이 필요합니다. 물론 시인은 그 절망의 와중에도 언어의 그릇을 하나 하나 정교하게 만들어 말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말들이 담긴 그릇과 그릇 사이에도 눈물이 흥건합니다. 언어 그릇에 담긴 기도의 말도 눈물이 절반이고, 비명이 사무칩니다. 문제는 호곡장 (號哭場)이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버린 듯하고 그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시인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표제부터가 그렇습니다. 시편88편은 ‘마할랏르안놋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노래를 ‘역경의 고통’을 노래하는 곡조에 맞추어 함께 불렀습니다. 심지어 예배 때 부른 찬송입니다. 이 표제가 던지는 메시지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호곡장(號哭場)입니다. 시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온통 부르짖음 일 때, 두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복자입니다. 웃을 수 있는 잔치의 자리이신 하나님 그리고 마음껏 울어도 그 눈물을 받아주는 호곡장(號哭場)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시니 얼마나 복된 자입니까?

울기 좋은 곳을 찾으십니까? 하나님의 가슴에서 우십시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상황의 어려움을 잊을 때가 아닙니다.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입니다. 이 여름 Prayer 9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웁시다. 그리고 응답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고백이 사무쳐 별과 같이 우리 여름 밤 하늘에서 빛나기를.

 

2019년 6월 27일

여러분과 함께 웃고 울며 기도하는,

이찬형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