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번역기, 예수 번역기
오래 전 제가 품었던 이상한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첫 딸이 네 살이 되었을 무렵, 태어난 딸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아이가 ‘엄마’라고 말할 때, ‘아빠’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매일 아이를 데리고 앉아서 ‘아빠’라는 단어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에게 ‘아빠’라고 했더니 ‘엄마라고 발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또렷하게 한 음절, 한 음절 가르쳤습니다. ‘아’했더니 ‘아’하고 따라했습니다. 속으로 “옳지”하면서 ‘빠’하고 가르쳤더니 ‘빠’하고 잘 따라왔습니다. ‘아빠’라고 했는데 ‘엄마’라고 말했습니다. 한 시간을 계속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비단 ‘아빠’라는 단어만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하늘, 꽃, 우유’같은 정상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나, ‘맘마(식사), 까까(간식), 넨네(잠자리)’ 같은 아기들의 은어들도 아이를 통과하면 모든 단어가 ‘엄마’로 발음되었습니다. 참 희한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 아이는 엄마 번역기구나’하면서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저의 이상한 열망은 엉뚱한 곳에서 수확이 있었습니다. 엄마 번역기인 아이를 바라보면서 신비한 상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바라보는 그 대상으로 모든 것을 번역하게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만납니다. 거기 예수 번역기가 있다면, 그 상황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통과하라. 나를/그러나 그 전에 번역해다오 나를” 시인 최승자는 자신의 시 [번역해다오]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시인에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 삶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 삶을 통과하며 그 사람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그 인생을 오역(誤譯)한 번역본들은 참으로 많을 겁니다. 많은 상처에 아팠을 번역본을 무색하게 하는 예수 번역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인생을 통과하며 영원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를 번역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이 더샘물 가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우리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 (행4:36)
키프로스라는 지중해의 섬에서 태어나 자란 레위지파에 속한 유대인 이민자 요셉은 우리에게 본명보다 별명인 바나바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왜 요셉의 별명이 위로의 아들(바나바)이 되었을까요? 아마 위로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들을 함께 하는 이들에게 그 상황을 다르게 보고 번역해준 것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바나바. 참 좋은 별명입니다. 이 별명을 부르는 사람이나, 별명으로 말하는 이가 다 웃음을 머금고 불렀을 이름입니다.
매주 목장모임을 합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통과할 때, 누군가를 번역할 일이 있을 때, 서로에게 예수 번역기가 되어주세요. 위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바나바가 되어 주세요.
2019년 4월 26일
예수를 번역하는 목장모임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