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과 우리 주님의 부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겨울은 따뜻했었다/대지를 망각의 눈(雪)으로 덮어주고/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T.S.엘리엇, 황무지, 1행]

글들은 가끔 오독을 통해 깨달음을 선물합니다. 이 시가 그렇습니다. 433행 이어지는 긴 시구(詩句)와 시인 스스로 자신의 시에 50개나 주석을 붙인 것이 말해주듯이 이 시는 난해합니다. 그럴 때 독자는 특권을 사용합니다. 마음대로 읽는 것-오독(誤讀)입니다. 제가 그 오독의 즐거움과 특권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독하는 건 다 제 탓입니다.

시인이 보기에 4월이 잔인한 이유는 겨울을 봄으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익숙해진 사람,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겨울은 기억 속에서 오히려 따뜻했습니다. 포기하고 안주한다면, 죽음도 익숙해져서 따뜻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왜곡된 기억과 안주의 욕망이 우리를 죽음의 겨울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봄은 겨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봄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냅니다.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깨어나라고 소리지릅니다.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겨울을 탈출하라고 계속 다그칩니다. 그래서 죽음의 겨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봄은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겨울이 따뜻하다고 속삭여온 일그러진 기억과 죄의 욕망에 머무르고 있는 망각의 눈(雪)은 차가운 얼음 알갱이들일 뿐이고, 결국 나를 얼어 죽게 할거라는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4월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잔인한 4월은 사실 우리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을 먹으며 겨우 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치 날개 짓 한 번으로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 새가 날개를 접고 걸어 다니기로 작정한 것처럼, 주님은 날개가 꺾이고 찢긴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의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악의 무거움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두절되는 극한의 고통을 당하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마29:39). 우리의 죽음을 죽이시려고 먼저 자신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겨울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요, 맏아들이 되셔서 우리를 그 부활의 세계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봄입니다. 봄은 부활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주님이 겨울의 땅에서 일으켜 세우신 라일락,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잔인할 만큼, 너에게 있는 죽음의 겨울을 끊어냈다. 이제 네 차례다. 다시 너를 겨울로 데려가려는 현혹들을 물리쳐라. 내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 그랬듯이, 죄에 대하여 잔인해져라. 죄를 끊어내라. 너는 가족과 이웃의 일상의 뜨락에 봄 꽃으로, 부활의 꽃으로 피어라.”

잔인한 4월을 오독(誤讀)하며 주님의 부활을 봅니다. 더샘물가족들이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주님을 읽어내고, 경배하고, 순종하며 꽃피우는 부활의 봄을 상상하면서

2019년 4월 19일 성금요일에,

예수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