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샘물의 경건사는 이유를 묻는다면

“남으로 창을 내겠소./밭이 한참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매지요.//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새 노래를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왜 사냐건/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全文)]

이번 주에 계속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자꾸 맘 속에 이 시구가 맴돌았습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웃지요…” 이 시는 시인 김상용이 1934년 [문학]지에 발표한 시입니다. 이 시의 뜻을 되새기면서 우리 신자의 사는 이유를 헤아려보았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인의 삶은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을 향하여 창이 나 있습니다. 현실은 가난하여 워낙 작은 밭인, ‘새참 한번 먹는 시간이면’ 다 갈 수 있는 밭에서 나오는 것으로 삽니다. 삶이 녹록치 않지요. 괭이질, 호미질 하다가 언뜻 올려 본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가며 말을 겁니다. “힘들지 않아? 뭐하러 이 고생이야? 그냥 훌쩍 떠나! 할 수 있는 일 많잖아!” 그렇게 구름이 꼬셔도 시인은 꿈쩍하지 않고 주어진 농사를 짓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삶에는 자족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답니다. 새 노래를 이렇게 기쁘게 듣는 것은 농사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연이 선사하는 음악이 충만하고, 시인은 그 기쁨이 이는 마음으로 자연에 화답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불쌍하게, 때로 답답하게 쳐다보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옥수수가 익거든 오셔서 같이 드세요.” 그 요청을 들은 사람이 묻습니다. “왜 그렇게 미련 떨면서 삽니까?” 시인의 대답은 웃음입니다. 대답이 없어서 웃는 게 아니라, 대답이 이미 분명해서 웃는 겁니다.

이 시를 읽으며 신자인 우리가 사는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까 생각했습니다. 삶의 모퉁이마다 질문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무엇때문에 살까요?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시인보다 평범한 일상을 살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보다 깊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냐구요? 우리도 웃습니다. 신자의 웃음 속에는 기쁨, 슬픔, 분노, 좌절, 환호, 즐거움…그 모든 죽음의 감정들을 딛고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순간, 삶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제자로 살고, 제자를 만듭니다. 질박한 삶이지만 분명한 삶의 목적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아이들이 따라갑니다. 어른이 자라가고, 아이도 따라 자랍니다. 우리는 다른 욕망으로 삽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삶의 숭고한 목적을 머리에 이고, 괭이와 호미를 들고 직장과 가정에서 일상을 목적으로 일굽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린아이같은 기쁨 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기쁨으로 삽니다. 또 어떤 이가 사는 이유를 묻는다면, 베드로전서3장13-16절을 기억하세요. 그 존재의 힘으로 일상을 채우는 더샘물식구들을 복주소서.

“여러분이 마음과 영혼을 다해 선을 행하면 누가 여러분을 방해하겠습니까?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러분은 훨씬 더 복된 사람입니다. 고난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분의 마음을 다잡고 여러분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할 말을 준비하되,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답변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사람들이 퍼붓는 욕설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깨끗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벧전3:13-16)

2018년 12월 6일

함께 일상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분투하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