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이며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던 날입니다. 사실 이날은 제가 태어난 날과도 같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에 태어난 게 괜스레 뿌듯했습니다. 그날은 실제로 교회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 역사적인 날, 루터는 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중세교회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을까요? 루터와 중세교회가 집중하고 있는 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높은 권세에 집중했고, 그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불안을 조성하고, 믿음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죄에 집중했고, 구원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고행도 열심히, 기도도 열심히 했지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절망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포기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는 말씀의 진리 앞에서 자유를 얻고 구원받았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의 말씀을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마치 목마른 사슴과도 같았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 데에 갈급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갈증을 느끼고, 무엇에 갈급한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더샘물 가족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에 집중하며 살고 있나요? 성경은 세상이 주는 만족에 집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상이 주는 만족을 얻기 위해 헤매던 중세교회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안락한 집, 마음껏 먹고 즐길 수 있는 돈, 나를 빛내주는 옷과 자동차에 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갈급하여 찾아야 할 것은 영적인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에 집중하길 원합니다. 연약한 마음, 사랑이 없음, 미워하는 마음, 부족한 지혜, 어리석은 욕심, 관계의 어려움, 게으름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곳에 더해지는 말씀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곳에 영적인 만족이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로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거룩하고 더 성화되기 위해 루터처럼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주님을 찾아가는 더샘물 가족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유아유치부 김주희 전도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