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설교준비를 하면서 10여 년 전쯤 있었던 일상의 기록을 일기에서 찾고는 웃었습니다. 그때 한 성도의 배려로 집으로 배달되는 물통과 냉온수기가 놓여졌습니다. 약수물처럼 시원한 물과 차를 끓이는 수고를 덜어주는 뜨거운 물이 동시에 나오는 샘이 집안에 생긴 셈이었죠. 가족들은 시원한 물에 감탄했고, 저는 뜨거운 물에 차를 끓이면서 감동했습니다. “음…참 편하네.”
그런데 문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였습니다. 강아지 샤무가 자신의 듣기 능력에 포착되는 낯선 얼굴을 가진 물통과 냉온수기를 적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존재가 내는 소음은 샤무를 공포로 몰아넣었나 봅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가진 덩치 큰 존재가 주방에 버티고 앉아 낯선 소리를 낼 때마다, 샤무는 등에 난 털을 곧추세우고는 필사적으로 짖었습니다. 그건 차라리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울음소리였습니다. 공격하겠다는 표시가 아니라, 쫓아 오지 말라는 애원이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야단도 쳐보고, time out도 해보고, 말도 해보았지만 샤무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가르치다 지친 제가, 짖다가 지쳐 제 무릎에 올라와 턱을 떨구는 강아지에게 말했습니다.
“샤무야, 저건 아무 것도 아니야. 절대로 너를 위협할 수 없어. 여기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어. 두려워 말아라. 두려움은 망상이야. 너를 위협하는 건 없어.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두려운 거야. 정확한 지식을 가져. 따라해봐. ‘물통은 나를 두렵게 만들 수 없다’ 알았지?”
딸 아이가 배꼽을 쥐고 웃었습니다. “아빠, 샤무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딸의 말이 맞았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피조물. 샤무. 대화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 피조물. 듣지 않고 짖어 대고 울기만 하는 피조물.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없는 괴물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돈키호테.
그런데 문득 이것이 현실을 살며 동시에 하나님의 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샤무에게 말했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독백을 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해 무거운 빚을 진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공포는 오늘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을 해석하지 못하는 믿음의 무지가 만드는 괴물입니다. 주님은 오늘의 불행과 내일의 좌절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시간이며, 오늘은 믿음의 지식으로 사는 신자가 은혜의 빛 아래 놓인 시간을 통과하는 신비의 공간입니다.
신자여.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하게하세요. 오늘은 신자의 즐거움으로 믿음을 인생의 아구까지 채우세요. 가나 혼인잔치처럼 주님의 잔치가 시작되도록.
2018년 1월 25일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 함을 기뻐하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