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여 년 전, 미국에서 목회할 때의 기억입니다. 그때 집에 냉온수기가 놓여졌습니다. 가족들은 시원한 물에 감탄했고, 저는 뜨거운 물에 차를 끓이면서 감동했습니다. “음…참 편하네.“ 그런데 문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였습니다. 냉온수기의 소음이 공포였나 봅니다. 물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아지는 털을 곧추세우고 짖었습니다. 공격하겠다는 게 아니라, 쫓아오지 말라는 애원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짖다가 지쳐 제 무릎에 올라와 턱을 떨구는 강아지에게 말했습니다. “샤무야,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너를 위협할 수 없어. 너는 보호받고 있어. 두려워 말아라. 두려움은 망상이야. 너 지금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두려운 거야. 따라해봐. ‘물통은 두렵지 않다’ 알았지?“ 딸 아이가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아빠, 샤무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맞습니다. 강아지는 듣지 않고 짖고 울기만 하는 피조물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없는 괴물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돈키호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걱정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무거운 빚을 진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의 불행과 내일의 좌절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시간이며, 오늘은 신자가 은혜의 빛 아래 놓인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신비한 날입니다.
최근에 읽었던 ‘아무튼, 명언’ 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정신과 의사가 걱정에 대해 쓴 것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세상에…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생각하는데, 한참 지나 돌아보면 여전히 걱정의자 위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걱정을 뭔가 노력하는 행위로 착각한다는 겁니다. 뇌가 쉬지 않고 작동하는 탓입니다. 게다가 몸이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으니 뭔가 하는 것 같죠.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것은 새해, 새마음으로 살려는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한번 걱정의 악순환을 타기 시작하면 걱정은 줄지 않고 늘어납니다. 걱정은 우리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하마입니다. 걱정이 일을 하는 듯 착각하는 사이, 걱정은 내 생각의 흔들의자에 앉아 나를 통치하려 듭니다. 내 마음의 좌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걱정을 떨치며 살려 하는데, 걱정은 늘 내 마음의 흔들의자에 있습니다. 걱정이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2026년에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걱정거리를 주노라.”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의 새해는 다릅니다. 주님을 의지해 기도하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성경은 주님이 대신 걱정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적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6:34).”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한답니다. ‘내일’에 인격이 있나요? ‘내일’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이 담기는 공간까지 통치하시는 주께서 우리 걱정까지 통치하신다 하십니다. 이 놀라운 영적 법칙안에 우리가 삽니다. 2026년, 모든 더샘물식구들 한 분, 한 분에게 고합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주님께 맡긴 내일 걱정 클럽’회원에 가입하세요. 어서! 한 해 내내, 그 복을 누리세요.
여러분과 함께 ‘주님께 맡긴 내일 걱정 클럽’ 회원에
가입하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