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종교개혁기념주일에 목회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공교롭게도 올해에도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휴직을 하고 육아를 하며 보냈습니다. 갑작스런 자궁출혈로 입원했을 때에도 성도님들의 기도에 힘입어 잘 회복했습니다. 참 감사드립니다. 그 날도 공교로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출혈이 있던 날은 예수님이 죽으셨던 성금요일이었지요. 저는 산후조리원에서 복상을 하며 이 말씀을 출입구절로 삼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이 후 병원에 있는 동안 저는 계속 되뇌었습니다. ‘오늘? 낙원? 아니겠지!’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닌데도 저는 불안에 떨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한 강도에게 하신 것입니다. 두 강도가 자기의 죄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 중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지요. 우리는 세상 끝 모든 인류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나라’를 바라본 강도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반면 ‘지금 여기서’ 구원해 보라며 비아냥대던 강도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똑같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내세에 있을 그의 나라를 본 자와 현세밖에 볼 줄 몰랐던 자의 죽음 이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면죄부를 사게 하려고 지옥을 내세워 두려움을 심었었지요. 값없는 구원을 사고 파는 행태로 만든 것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누군가가 면죄부를 판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비웃음을 당하게 되겠지요. 이 세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세에 대한 기대와 소망조차 비웃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밖에 볼 줄 모르는 강도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신자의 삶 자체는 복음의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의 나라를 보고 그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까요. 같은 십자가에 매달릴지라도 자신의 죄를 돌아봅니다. 같은 고통이 지나가도 남에게 화풀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좌절 속에서도 소망을 품습니다. 저는 ‘오늘’이라는 문자 자체에 사로잡혀 두려워 했지만 그 두려움 앞에서도 유일하게 붙들 수 있는 이름이요,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이름이 있었기에 버텼고,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이름 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돌아봅니다.  예수님도, 지옥도, 구원도 거부하고 지금만 중요해진 세대 속에서 이 세상 끝에 올 새로운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를 고백하며 사는 것, 우리의 삶을 통해 그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눈을 들어 하늘 위에 계신 주님과 그의 나라를 고백하는 날이 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유아유치부 전도사 김주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