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인내_주님께 정주(定住)하기 위한 순례
오래전, 런던에서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머무는 2년여 동안 집 건너편에서는 주택 리모델링이 계속되었습니다. ‘빨리빨리’가 구호인 기민한 민족 대한민국이라면 한 달이면 끝날 일이었습니다. 일 년 뒤에도 일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공간에 ‘빠름’이라는 정서를 안착시킨 마음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궁금함을 넘어 답답함이 가득했습니다. 귀국할 때까지 그 공사가 끝난 걸 보지 못했습니다. 한참 지나 문득, 그 런던 거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빠름이 미덕인 세상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집을 건축할 때, ‘양생’이 필요합니다. 양생은 타설 한 콘크리트가 균열을 피하고 튼튼한 건물로 세워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입니다. 하려는 일, 사람의 성장 그 무엇에나 기다리는 시간, 곧 인내가 필요합니다. 봄에 파종한 씨앗을 기다려 가을에 추수하듯, 인생도 기다려야 합니다. 서사(敍事)가 없는 인생은 사는 의미를 누리거나 전할 수 없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어려움, 고난, 결핍, 실수와 넘어짐의 대칭이 한 사람의 인생 서사를 만듭니다. 인생은 늘 역설입니다. 그 서사가 만들어지는 자리에 항상 양생이 필요합니다. 인내와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으로 길러진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가르칩니다.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벧후 3:15).” 우리의 인생 한순간도 주님의 은혜 없이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닮아 누군가를 인내하며 즐거이 기다리는 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신 구원을 입은 바, 우리도 누군가를 끝까지 인내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참아야 할까요?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 하십니다(약 5:7).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 안으로 들어와 특권을 얻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와 함께 오래 참음으로 옷 입게’ 되었습니다(골 3:12).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단수’로 기술했습니다. 아홉 가지 열매가 한 나무가 맺는 열매라는 거지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 새로운 우리 삶의 출처를 확인합니다. 생명의 마르지 않는 물 근원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 인내 안에 배인 사랑이 우리 삶에서 꺼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열매 맺었습니다. 여기가 기독교 윤리가 출발하는 지점입니다.
어떤 이의 표정, 말투, 태도가 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라는 건축물’이 공사 중이라서 형편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신자는 인내의 옷을 입고 ‘불평할 일을 용납으로 바꾸고 나아가 용서’합니다. 우리 안에 그 능력은 없습니다만, 주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에(골 3:13), 신자인 우리에게 드러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전도서 7:8은 “마음이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합니다. 참지 못할 상황과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그 상황에 모시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빨라야 생존한다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인내는 가르칩니다. 인내는 무작정 멈춘 것 같은 느림의 시간이 아니라 정확한 주님의 시간에 정주(定住) 하기 위한 믿음의 순례입니다. 돌아보아 주님을 배우는 또 한 주를 기대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사순절 셋째 주를 보내면서,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