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믿음의 내리사랑을 믿습니다

“나는 부사를 쓴다. 한 문장 안에 하나만 쓸 때도 있고, 두 개 이상 넣을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부사를 쓰고, 부사를 쓰면서, ‘부사를 쓰지 말아야 할텐데’하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나는 부사가 걸린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 등단한 뒤로 이렇게 한 문장 안에 많은 부사를 마음껏 써 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김애란 산문, 잊기 좋은 이름 중에서 일부 발췌]

우리 사역자들이 종종 이런 의견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국어학자나 아나운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말과 글로 소통하기에 가능하면, 정교한 문법과 문장 그리고 어휘를 구사하는 게 맞다.” 코로나19를 만나면서 더 단련되어 갑니다. 설교문 같은 구어체 문장을 구성하면서도 늘 걸리는 게 부사입니다. 좋은 문장은 부사가 절제된 문장입니다. 그래서 가끔 머리에 가득 들어찬 묵은 문장들을 털어낼 때, 전혀 연관 지을 수 없는 작가나 주제의 책을 읽으며 배웁니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이 김애란 산문입니다. 2006년쯤 접하게 된 소설가 김애란의 소설에 나타난 세계관에 놀라서 나오는 족족 그녀의 소설을 탐독한 적이 있습니다. [부사와 인사] 꼭지를 읽다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누구보다 ‘부사 멸절’의 의지로 불탔을 소설가가 원고지 위에 ‘부사를 향한 사랑고백’을 하다니. 한참을 웃다가 바보처럼 인생 앞에 엄숙 해졌습니다. 작가는 문법의 부사(와 인사를 나눈 게 아닙니다. 그녀가 만난 인생들과 인사를 나눈 겁니다. 쓸모없다 버려진 수많은 판단의 희생자들,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은 부사를 통해 ‘실천력은 하나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을 떠올린 겁니다. 어떤 사람은 부사처럼 무능하고 과장합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부사는 하나님 사랑의 은유입니다.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는데, 굳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사랑의 하나님은 부사처럼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끝까지 설득하려는 질박함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무차별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은혜가 증명합니다. 돌짝밭, 가시덤불, 길가 같은 처참한 우리 상황에 상관없이 말씀을 쏟아부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구원은 하나님이 자신을 탕진하시고, 자신을 부수어서 나누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대부분 부사처럼 무참히 버려집니다. 부사는 하나님을 사랑을 따라 그 사랑을 내리사랑으로 주려고 안간힘 쓰는 부모를 많이 닮았습니다. 헛되이 써도 헛된 것이 없고, 낭비하는 것 같아도 모든 시간을 들여서 세우고 싶은 인생이 우리 자녀의 인생입니다. 우린 모두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30년 후에 지금 현존하는 교회의 96%가 사라진 세상에 자녀들을 남겨두고 싶은 부모는 없습니다. 적어도 더샘물교회식구들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먼저 할까요? 믿음계승과 선교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버려지는 부사처럼 쓰여도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다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그 부사 같은 사랑을 알고 누리고 나누는 일입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자녀들을 세우는 거룩한 낭비에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영광된 교회로 지어져 가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