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사람뿐 아니라 우리’를 서로 세우는 교회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등이 흠뻑 젖어 들고 있다/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자장가를 흥얼거렸다//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박서영, 업어준다는 것, 하략]

시인은 사람이 짐승을 업고 가는 흔치 않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검은 염소는 할머니에겐 가족 같았습니다. 적어도 70년 이상의 생애를 짊어진 ‘노파’라고 불릴만한 생애동안 육체적인 힘은 이전보다 빠졌지만, 사랑은 이전보다 강해졌습니다. 자녀와 손주들에게 보였을 응시처럼, 염소와 눈을 맞추려는 고개를 돌리고, 체온을 교감하면서 감춰진 울음을 느끼는 것, 서로 찌르지 않고 받아주는 것을 업어주는 것이라 시인은 정의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문학은 가끔 교회를 정신 나게 합니다. 소설가, 시인 같은 이들의 시선을 빌려서 세상과 세상에 사는 우리네 삶의 거칠고 고운 결을 엿보게 됩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뿐 아니라 우리”를 서로 세워가도록 목적을 향해 부르셨습니다. 힘이 없는 할머니가 등을 내밀어 염소를 업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모두에게 등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어렴풋한 옛날, 언젠가 우리 각각에게 누군가가 내어주었을 그 등허리를 더듬어 기억하며 이제 우리가 내어주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그 사랑의 빚으로 길을 내어 걸어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의 결정체들입니다. 누구보다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1서 3:22-23)

등허리를 내어주어야 그 생애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 등이 청진기처럼 닿을 때, 그 생애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이 들릴 겁니다. 우리의 등은 코로나19로 경제적 고통을 직면한 성도들에게 그 사랑을 울려내는 확성기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6:3)하라는 주님의 분부를 잘 따르길 원합니다. 그 등이 되어주세요. 그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이고, 그 자리에 예수를 아는 기쁨을 선물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됨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의 슬픔을 헤아리는 거룩한 청진기가 되어주세요. 슬픔을 닦아내고 기쁨이 담기도록 사랑의 그릇에 마음을 담아주세요

2020년 5월 3일

여러분과 함께 사랑의 그릇에 마음을 담는,   이찬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