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무릎, 하고/부르면 좋아진다/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시인 김경주, 무릎의 문양, 일부 발췌]
시인은 몸의 파문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도는 자리, 인생의 무거움이 한 곳에 모이는 자리를 무릎이라 합니다. 인생은 한없이 가볍다가도, 누군가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책임져야할 몫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인생의 무게는 버겁기만 합니다.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있고, 그 책무감의 무게를 아는 곳이 무릎입니다. 인생의 모든 시름이 고이는 곳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 부모의 무릎을 베고 누운 적이 있습니다. 무릎을 고요히 내주던 부모를 가진 사람들은 복됩니다. 인생의 천근만근이 고인 그 아픈 곳을 내주면서도 내색없이 고요했던 부모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귓가에 간직한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은 복됩니다. 그렇게 우린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 무릎의 무게를 간직하고도 너털웃음으로 간간히 압력을 빼면서 자녀세대에게 고요히 무릎을 내줄 준비를 하고 있으니. 무릎은 이전세대의 인생이 정박하고, 다음세대의 인생이 출항하는 항구와 같습니다.
신자는 일찍이 무릎의 무게를 감당할 방법을 전수받았습니다. 인생이 부서져라, 닥쳐오는 폭풍과 그 파문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때로 멍든 피눈물로 고이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는 무릎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를 배웠습니다. 솔로몬은 그 인생의 가장 순전한 때, 성전을 봉헌하면서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하여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드렸고(왕상8:54),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는 거짓 예언자 850인과 맞서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할 때, 땅에 무릎을 꿇고 그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거기 임했습니다(왕상18:42). 엘리야가 낙담해서 도망갈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왕상19”18).” 무릎! 바알에게 끓지 않은 무릎 칠천 개! 그것이 엘리야에게 주신 위로입니다. 무릎, 그 인생의 무게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그 신자됨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 때, 위로를 받습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위로의 선물은 너 같은 무릎의 사람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더샘물 성도들이 서로에게 이런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AD 44년 아그립바 Ⅰ세의 박해로 투옥되었던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출옥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교회를 부탁했습니다(행12:17). 그 때부터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되어 섬겼습니다. 최초의 기독교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야고보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모든 인간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야고보의 무릎은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인이라 불렀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릎의 사람이 더 있어서 서로를 위해, 그 인생의 무게를 주님께 드리는 이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연결된 교회가 더샘물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2020년 서로를 위한 칠천 명이 되어 주세요. 그 무릎의 사람이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