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에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에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 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 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억누름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우리 생존권에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명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중략……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 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하략…“

기미독립선언문 일부 발췌(현대어 번역본)]

기미독립선언문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운동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33인의 대표자 중에 기독교인이 16인이었을 만큼 기독교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인구의 1.3%~1.5%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기독인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지만, 피해도 컸습니다.

제암리교회당은 일제가 신자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29명이 희생되었고 교회가 전소되었습니다. 장로교인만 사살, 타살된 사람이 52명, 체포된 신자 3,804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목사, 장로가 134명으로 당시 장로교 목사, 장로 전체 1,024명 중에 13%에 해당되는 숫자였습니다.

3.1운동 당일,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포함한 8-9곳이었습니다. 확인된 곳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입니다. 첫날 만세운동에 이어 그 이튿날에는 함흥, 해주,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등지에서 일어났고, 사흘째 되는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시위참가자는 서울의 수십만을 비롯하여 의주 3만명, 강화읍 2만명, 합천 1만명, 삭주군 8천명, 선천읍 6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시위는 총 2천(일제측 1,524)회가 넘었고 연인원도 202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50명 이상 모인 곳만 통계를 잡은 일제 경찰 통계에 의한 것이지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1년 간 1천만명이 참여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북간도와 미주에서도 운동은 이어졌습니다. 이 위대한 운동은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을 걸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1.3%~1.5%의 기독인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3.1운동의 20% 이상의 역할을 감당했고 위험을 감수하며 민족의 문제를 함께 겪어내며 한국 근대사를 형성했습니다. 그 백 년의 기억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와 자녀 세대에도 공적인 영역에서 위기를 해석하고 민족을 섬길 수 있는 신자들과 미래교회를 허락해달라고. 또 주님이 인도해달라고. 백 년의 기억이 또 다른 백 년을 준비할 힘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19년 2월 21일

3.1운동 백 주년 감사예배를 준비하면서,

이찬형 올림